尙書의 追憶旅行

自由揭示板

함흥차사(咸興差使)의 由來

李榮培 2018. 10. 1. 15:31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유래 한 번 심부름을 간 뒤로 아무 소식이 없을 때 쓰는 말로, 이씨조선 태조 이성계의 일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창업을 할 때에, 방원(芳遠)은 큰 공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계비(繼妃)인 강(康)씨의 소생 방석(芳碩)을 세자로 봉했다. 이에 방원은 불만을 품고 방석을 옹호하는 정도전(鄭道傳)등을 죽이고 방석을 폐묵(廢默)시켰다. 이렇게 되니 태조가 크게 노하여 장남인 정종(定宗)을 임금 자리에 앉히고 함흥으로 가서 머물러 있 었 다. 그 후, 태종 임금이 된 방원은 아버지의 노한 마음을 돌리려고 수없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냈다. 그러나, 태조는 이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보면 당시의 사정을 말해 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당시에 문안사가 한 사람도 돌아온 이가 없었다. 태종이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누가 갈 수 있는가?" 하니 응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 순(朴淳)이 자청하여 갔는데, 하인도 딸리지 않고 스스로 새끼 달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 있는 곳을 바라보고 일부러 그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놓고 그 어미 말을 타고 나아가니, 어미 말이 머뭇거리면서 뒤를 돌아보고 서로 부르며 울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아니 하였다. 태조는 말의 하는 짓을 보고 괴이히 여겨 물었더니, 그가 아뢰기를, "새끼 말이 길가는 데 방해가 되어 매어 놓았더니,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지친(至親)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 하고, 풍자하여 비유 하니, 태조가 척연(慽然)히 슬퍼하고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귀었던 옛 친구의 정으로서 그냥 머물게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하루는 태조가 순(淳)과 더불어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가 그 새끼를 끼어 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아니 하였다. 순이 다시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 줄 것을 간절하게 아뢰니 태조가 이에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 하였다. 순은,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허락을 듣고 곧바로 그 자리를 하직하고 떠난다! 태조를 따라와 모시고 있던 측근 여러 신하들이 극력으로 순을 죽일 것을 청 하였다. 태조는 그가 용흥강(龍興江)을 이미 건너갔으리라고 짐작하고, 사자(使者)에게 칼을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미 강을 건넜거든 쫓지 말라.'하였다. 한데, 순은 공교롭게 병이 나서 중도에서 체류 하였다가, 겨우 강에 도달하여 배에 오르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드디어 그 허리를 두 동강으로 베이었다! 그 때에 '반은 강 속에 있고 반은 뱃속에 있다'[半在江中半在船]하는 시가 있었다. 태조가 이 얘기를 듣고 크게 놀라 애석하게 여겨 이르기를, "박 순은 좋은 친구 이다. 내가, 내 전일에 그에게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 ,드디어 남으로 <한양에> 돌아가기를 결정 하였다. 태종은 순의 죽음을 듣고 곧 그의 공을 생각하여 벼슬을 증직 하였으며, 또 화공에게 명하여 그 반신을 그려서 그 사실을 나타내었다. 그 부인 임(任)씨는 그 부고를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한다. 이토록 태조의 심정을 돌리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은 마음을 돌려 한양으로 왔지만, 이전에 간 문안사는 모두 죽고, 죽고 하여 소식이 있을 리가 만무 했다. 여기서 「함흥차사」란 말이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