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알밤이에요 :)
오늘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임기순서와 주요사건에 대해 알아보아요!
1대 대통령
2대 대통령
3대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조선·대한제국·일제 강점기의 개화파·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인·교육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서훈되었다. 본관은 전주이고,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주요사건에는 6.25전쟁과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는 1948~1960년까지이다.
4대 대통령
윤보선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윤보선대통령의 주요사건은 대통령관저 이름은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명칭변경을 한것과
5.16 군사정변이 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임기기간은 1960년부터 1962년이다.
5~9대 대통령
박정희
.박정희(朴正熙,[4]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병과(兵科)는 포병(砲兵)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군 장교를 지내던 중 형인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되자 이재복의 권유로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5][6]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변란 성격의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깨면서 군복을 벗고 직선제로 치루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 당하였다.
박정희대통령의 주요사건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베트남 전쟁 파병. 한일협정, 3선개헌
1.21 김신조사건, 새마을운동 등이 있다.
박정희대통령의 임기기간은 1963~1979년이다.
10대 대통령
최규하
최규하(崔圭夏, 1919년 7월 16일~2006년 10월 22일)는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이다. 제4공화국의 2번째 대통령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이었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현석(玄石)이다.
1945년부터 경성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 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된 이후, 정부수립 후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외무부로 발탁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말레이시아 대사로 임명된 후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기도 했으며 귀국 이후 1967년에 외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1967년 제22차 유엔 총회 수석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외무부 장관 재임 시절에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 행정 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 외교를 강화했다.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해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 방문했다.
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됐으며,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신임됐다.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10월 27일부터 1979년 12월 6일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1979년 12월 6일부터 1980년 8월 16일까지 군부 실권하의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대통령 재직 시기,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재직 초반부터 하나회가 반란을 일으켜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에는 민주화 시위가 터지기도 했다. 서울의 봄 이후에도 계속 통치하다가 1980년 8월 16일 대통령 직에서 퇴임했고 퇴임 후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잠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영어를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 인물은 싱먼 리 다음으로 최규하가 꼽힌다.
최규하 대통령의 주요사건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따.
최규하 대통령의 임기기간은 1972년부터 1980년이다.
11대 대통령
12대 대통령
전두환
전두환(全斗煥, 1931년 3월 6일 (음력 1월 18일)[2] ~ )이는 대한민국의 제 11·12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합천이다.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지만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하였다.[3]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5.16 직후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하였고,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교육장교, 육군보병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지도세력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혁명 당시 육사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뻔한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 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을 주도한 폭도였다.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주요사건은 너무 많다
통신망 구축과 자율화 정책 및 연좌제를 폐지했고 사교육 폐지 및 두발 자유화등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국민을 상대로 총을 겨누었던 정권이였기에 후대에 평이 좋지 않다.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기간은 1980년부터 1988년이다.
13대 대통령
노태우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1] ~)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교하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 김복동의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군사 반란 등에 가담했다. 제12대 국회의원과 정무2장관, 체육부와 내무부의 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지냈다.
노태우 대통령의 주요사건은 서울올림픽 개최와 언론자유화 범죄와의 전쟁이 있다.
14대 대통령
김영삼
1954년 거제에서 만 27세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박정희 정부로부터 질산 테러 등의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1979년 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 동안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선언하여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6] 1993년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32년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었고, 문민 정부를 열었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허용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킹염삼이라고 불릴만큼 시원한 업적이 있다. 조선총독부를 해체했다.
이외에는 해당 기간에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고 IMF 구제금융이 있다.
김영삼대통령의 임기기간은 1993년부터 1998년까지이다.
15대 대통령
김대중
김대중(金大中[1],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고,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대통령 재임중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오랫동안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2]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3][4][5][6]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주요사건은 연평해전과 6.15 남북 공동선언 2002년 월드컵 개최가 있다.
김대중대통령의 임기기간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이다.
16대 대통령
노무현
노무현(盧武鉉[5],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6]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생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17대 대통령
이명박
이명박(李明博[1], 1941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호는 원래 일송(一松)이나 서울특별시장 시절이던 2005년 10월 26일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한 고대 동문 김정배 위원장의 권유에 따라 청계(淸溪)로 바꿨다.[2] 1970년 12월 19일 김윤옥과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시형, 딸은 주연, 승연, 수연이다. 서울시장으로 있던 2006년 2월 21일 제33회 초교파 전국 목회자 부부 영성 세미나에서 "가난한 집안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을 통해 성공했다"고 간증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주요사건은 광우병사태와 연평도 포격사건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이 있다.
이명박대통령의 임기기간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이다.
18대 대통령
박근혜
박근혜(朴槿惠[3], 1952년 2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또한 최초로 탄핵 절차를 거쳐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대통령이다.
제 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차녀[주 2]이자 육영수의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나 군사반란 지도자였던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1963년 이래 청와대에서 자랐다. 1970년에 서강대학교에 입학하여 1974년에 졸업했고,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1974년 모친 사후 귀국하여 1979년 10.26 사건 이전까지 사실상 대통령 배우자 직무를 대행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에는 청와대에서 나와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의 주요사건은 세월호사고와 메르스 그리고 최순실 비선실세 사건등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탄핵대통령이자 여성대통령이다.
박근혜대통령의 임기기간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이다.
19대 대통령
문재인
문재인(文在寅, 1953년 1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며 박정희 유신 독재에 항거하다가 1975년 서대문구치소에 투옥됐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에는 신체 검사도 받지 않은 상태로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특전사로 군복무를 마친 후 복학해 다시 학생운동을 이끌며 전두환 군부 독재에 항거하다가 1980년 청량리구치소에 투옥됐으나, 조영식 경희대 총장의 신원보증하에 옥중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극적으로 석방되었다. 1982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 임용이 거부됐다고 알려졌으며,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주요사건으로는 평창동계올림픽과 남북정상화담등이 있다.